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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비처럼, 그리고 멈춤과 스며듦

비와 함께 한 하루 비가 멈추지 않는 날, 강과 정원 그리고 고양이들

금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뉴욕은 비상사태라던데, 다행히 내가 있는 곳은 피해 없이 조용히 비만 내리고 있다.

며칠째 이어지는 비 덕분에 산에도 못 가고,
그래도 모처럼 내리는 비라 그런지 찬 비바람이 참 시원하다.

창문을 열면 습한 공기 속에서도 묘하게 차분한 기분이 든다.


밀렸던 집안일을 마치고 나니 괜히 심심해졌다.
겨울이 오기 전에 생강이나 사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겸사겸사 시원한 공기도 쐴 겸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에지워터 홀 푸드에 들러 생강가루를 집어 들고 매장을 둘러보니,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 예전 같지 않게 물건 값이 많이 오른 게 눈에 띄었다.
사람들도 전보다 훨씬 적었다.

홀 푸드 앞을 지나 허드슨강 쪽으로 걸어가는데,
며칠 전만 해도 낮던 수위가 오늘은 훨씬 차올라 있었다.

회색 하늘 아래 강물이 넘실거리며 흐르고,
잔잔했던 강변이 비와 바람을 따라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


멀리 보이는 도시는 안개처럼 흐릿했고,
강 건너편 건물들은 구름에 반쯤 가려 있었다.
맑은 날의 반짝임 대신, 오늘의 허드슨강은 잿빛의 고요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물결이 잔잔히 부딪히는 소리, 젖은 공기,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 모든 게 어쩐지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잠시 서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 그리고 물 위로 번지는 빗방울 소리.

비가 불편하기도 하지만, 또 이렇게 멈춰 서서 바라보게 되는 풍경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문득 뒤뜰 텃밭이 생각났다.
지난주에 뿌린 씨앗들이 비 덕분에 잘 자라고 있을까 궁금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난 원래 비가 와도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

보슬비 정도라면 그냥 맞는 게 편하고, 비가 피부에 닿는 그 느낌이 싫지 않다.


뒤뜰로 나가니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젖은 흙 냄새, 풀 향기, 그리고 물방울이 스치는 소리까지 —
온 세상이 천천히 숨 쉬는 기분이었다.

비바람이 세게 불었던 탓인지 깻잎 몇 장이 떨어져 있었고,
토마토 나무는 잎이 젖어 조금 추워 보였다.
깻잎들은 물을 머금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온이 내려가서 그런지 이제는 초록빛이 바래며 가장자리부터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작은 낙엽처럼. 계절이 조금씩 옮겨가고 있구나, 싶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리오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성격이 조심스러워서 먼저 마중은 잘 안 나온다.
누가 오는지 확인하고, 그게 나라는 걸 알면 그제야 슬쩍 다가와 몸을 비빈다.

루나는 그 반대다.
리오의 누나인데, 항상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상을 본다.
둘은 같은 나이지만 리오가 몸집이 훨씬 크다 —
남자라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더 애정이 많아서인지 항상 내 옆에 붙어 있는 편이다.
루나는 오빠가 없을 때에야 조용히 다가온다.

그 거리감조차 그들만의 방식이라 생각하면 미소가 난다. 🐾


나는 비가 좋다.
비는 언제나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 같다.
비가 내릴 때마다 흙이 숨 쉬고, 그 안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그래서인지 비가 오면 늘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비는 단순히 땅을 적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도 촉촉하게 적셔주는 존재 같다. 🌧️


지난번 산에 갔을 때 봤던 뉴저지 상수도원의 바닥이 바짝 드러나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이번 비로 물이 많이 차올랐겠지.
에지워터의 허드슨강 수위가 높아졌던 것처럼.

이렇게 자연은 스스로의 균형을 되찾으며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간다.
사람이 만든 것들은 겉으로는 더 화려하고 편리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자연의 질서 안에서 움직인다.

그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지혜 아닐까 싶다.

오늘의 비처럼,
우리도 때로는 멈추고 스며들며, 조용히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